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주 공방전 (문단 편집) == 평가 == > 태조가 수군을 이끌고 금성(나주)을 점령하니, 주변 여러 섬의 이익이 모두 들어와, 그 재력으로 마침내 삼한을 통일하였다. >---- > [[고려사]] 사실상 우리가 아는 [[태조 왕건]]을 만들어준 '''왕건의 최대 업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왕건이 직접 갔든 부하만 보냈든 한두 번 정벌이 아니라 계속 수군력을 투입하여 서남해와 각 섬들을 점령하면서 백제를 괴롭히고 이곳을 기점으로 남해에도 병력을 투사한 것으로 보인다. 견훤은 일차적으로 나주 평야와 그 부속도서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이로 인해 나주 평야의 준수했던 농업 생산력을 상실하고, 영산강 수운과 서남해안의 제해권을 완전히 잃어버리면서 이를 통한 교통과 상업의 손실도 결코 적지 않았다. 또한 당시 소금의 위상을 생각하면 이것을 잃은 손실도 제법 되었을 듯. 이후 왕건이 역성혁명을 일으키고 백제가 승승장구할 때까지 백제 수군은 없다시피 하였다. 왕건의 첫째 부인이 수군이 주둔했던 정주 출신 류씨고, 둘째 부인이 나주 출신 오씨라는 걸 생각하면 왕건 스스로에게 이 작전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잘 느낄 수 있다. 여러모로 [[후삼국시대]] 중반 최고의 사건. 이후 백제가 승승장구할 때 나주를 재점령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유금필]]이 재탈환한 이후 견훤이 고려로 망명할 때 나주를 이용해서 탈출할 수 있었다. 정말 여러모로 나주는 고려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였던 것. 고려에서 국가에서 주관하는 산신제를 지내는 사당 5곳이 있는 산은 고려 수도 개성 송악산과 나주 금성산뿐이였다. 여담으로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는 그 시작부터 자세히 묘사하며 왕건의 전략전술을 보여주며 그가 [[궁예(태조 왕건)|궁예]] 치하에서 어떻게 잘 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로 내세운다.[* 아예 이 작전을 위해 왕건을 잠시 파직시키며 '''백제의 내부에 고려의 깃발을 세운다'''는 게 크게 묘사된다.] 한편 나주는 [[태조(조선)|이성계]]의 동북면처럼 왕건의 영지가 되어 궁예에게 의심 등 압박을 받을 때마다 백제의 위협을 핑계로 나주로 향하는 걸로 묘사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